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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곤은 밀양인 이였다!
내가 죽은뒤 비단을 입히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마라
[2003-05-12]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남곤(南袞:1471-1527)에 관한 소고(小考) -남곤(南袞)은 밀양인(密陽人)이였다!- 남곤(南袞)은?: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였다.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자(字)는 사화(士華), 호(號)는 지정(止亭) 또는 지족당(知足堂)으로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이며 곡산(谷山)군수를 지낸 치신(致信)의 2남으로 밀양부(密陽府) 부북면(府北面) 대항리(大項里: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대항2리 457번지 "남곤의 딱밭"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던 외가(외조부:河備)집에서 1471(성종2:신묘)년에 출생하여 어릴적 점필재 문하에서 외사촌 하충(河沖)과 함께 수학하였다. ●1489년(성종20)19세때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1494년(성종25)24세때 별시(別試) 문과(文科)에서 을과(乙科)로 급제(及第) 하여 출사(出仕)했고 ●1495년(연산원년)3.5 주서(主書)가 되었으며 ●1496년(연산2)11.18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질정관(質正官)의 소임(所任)을 맡아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498년(연산4)1.5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1500년(연산6)5.29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1502년(연산8)2.9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를 거쳐 ●1503년(연산9)1.2 시강관(侍講官),시독관(試讀官),참찬관(參贊官),전한(典翰),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이르렀다. ●1504년(연산10) 6월에 훈구파(勳舊派)인 임사홍(任士洪)과 신수근(愼守勤)등 일파가 정권을 장악(掌握)하고 일찍이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廢妃 尹氏)를 폐위(廢位)하여 사사(賜死)케 한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여 왕을 격분(激忿)시키는데 성공 하고 폐비와 관련된 김굉필(金宏弼),윤필상(尹弼商),성준(成浚),이세좌(李世佐)등 조신(朝臣)이 사형(死刑)되고 이미 사망한 한명회(韓命會),정창손(鄭昌孫),정여창 (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이 부관참시(剖棺斬屍)된 사화(士禍:甲子士禍)가 발생하 여 남곤도 이때 고신(告身)을 강제(强制)로 반납(返納) 당하고 서변(西邊)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1506년(중종원년) 9월에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中宗)이 집권(執權)하면서 풀려났다. ●1507년(중종2)1.30 박경(朴耕),김공저(金公著)등이 대신(大臣)을 모해(謀害)하여 조정(朝廷)을 어지럽혔다고 고발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차(陞差)되었다. ●1508년(중종3)10.29 겸(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 남곤은 글재주가 뛰어나서 당대를 대표할만한 문사(文士)로 인정받았는데,조선조 성리학의 태두(泰斗)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文人)을 사림파(士林派)와 사장파(詞章派)로 분류하면 남곤은 김일손(金馹孫),표연말(表沿沫),박한주(朴漢柱), 유호인(兪好仁),권오복(權五福) 등과 더불어 사장파로 분류된다. 이러한 연유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죽임을 당한 탁영(濯纓:金馹孫)의 묘를 이장할 때 남곤은 글을 지어 "공(公)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소장(疎章)과 차자(箚子)의 문장이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인물은 시비하고 국사를 논함이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 같았다. 애석(哀惜)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 공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다.불행한 때를 만나 화(禍)를 입고 죽었구나" 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시(輓詩)를 짖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귀신(鬼神)은 아득하고 어두운데 천도는 진실로 알기도 어렵구나.귀신도 천도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는 달라 화와 복을 항상 거꾸로 베푸나니,길고 긴 이 우주(宇宙)에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라.촉루의 즐거움이 인간 의 임금보다 나은지 어찌알랴,달관으로 한 웃음에 부치니 뜬 구름처럼 아득하다.다만 아깝기는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 한번 나기 매양 어렵도다. 수백년을 걸려서야 겨우 한번 보게되네. 그를 보고도 성취시키지 못하니 태평의 다스림을 어느 때에나 보랴, 나의 난 것이 무슨 다행으로 그대와 동시였네,서한시대(西漢時代)의 문장이요,송(宋)나라 원풍(元豊).희녕(熙寧)시대의 인물이었네,정치의 잘못됨을 한 숨 쉬고 통곡(痛哭)하며,옳은 일이라면 용감(勇敢)히 하였도다. 강관의 무리들이 옆에서 이를 갈며 엿보는 줄 어찌 알았으랴, 큰 칼 쓴 죄인으로 문득 사형장(死 刑場)으로 가란 말가, 세상 만사에 없는 일이 없구나, 동해 바다가 끝없이 너르네, 지금은 세상이 바로 되어가 혹한 법도 풀어져 선하고 악한 것이 구별이 되네, 어찌 무오년의 원통(寃痛)함은 아직도 신설(伸雪)하지 못하는고,춘추의 필법에는 내 임금의 허물을 위(諱)하는 예가 있어 정공(定公).애공(哀公)의 기록에는 숨긴 말이 많다하나 이렇게 춘추(春秋)를 지은 성인(聖人)은 하늘과도 같아서 후세 사람 따를 바 못되고,붓을 잡아 들은대로 쓰는 것은 사가(史家)의 상례이다. 들은바 가 바르고 틀림이 있다해도 그것은 사람의 사견(私見)이다. 그것을 정리 편찬하는 데는 실록청(實錄廳)이 있으니 허위로 된 것이면 깎으면 그만인데 다만 뱃속의 칼이 터럭속의 흠터를 찾아냈네. 위(魏)나라 사람들이 국악(國惡)을 써서 길거리 에 보인 것과는 비할 것도 아니로다. 벼슬 자리에서 직무(職務)를 행하지 못했다면 그 죄는 매를 치면 될 것이요,현능한 인재에는 특별히 용서하고 감형하는 옛 법도 있는 바다. 이런 말씀 아뢰어 임금의 의혹을 풀어드릴이 없구나. 세월도 10년을 넘게되니 식자들의 가슴에 영원한 슬픔이여,파타성(跛 城) 성동의 낮은 언덕 초라하여 시체 감출곳 되지 못하네 사랑하는 자질들이 좋은 땅 가려 이장 (移葬)하려 하도다. 그대는 지금 하늘 위에서 굽어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솔개나 굼벵이를 택하지 않거든 하물며 이땅저땅 상관하랴마는 인간에서 구구하게 성묘 (省墓)하고 제사(祭祀)드리기 편함을 취함이네.처량하다 목천현(木川縣)에 구불 구불한 산기슭, 후일에 도지(圖誌)를 편찬(編纂)할 때 이 무덤 기록하여 빼지마오.」라고 하였다. 참고로 남곤이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였던 사실을 도학연원체계도(道學淵源體系圖)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鄭汝昌 ┌趙光祖 鄭夢周-吉再-金叔滋-金宗直-+--士林派─┤ │金安國 | │金宏弼 ─┤金正國 | │ │金 淨 | └曺 偉 └金 湜 | | ┌ 南 袞 兪好仁 朴漢柱 +---詞章派 ┤ 表沿沫 李 穆 崔 溥 │ 金馹孫 李宗準 姜 輝 │ 權五福 權景裕 李守恭 │ 李 曺 許 磐 └ 南孝溫 李孟專 ●1509년(중종4)6.6 특진관(特進官)으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할때에 소금을 전매(專賣)하여 국비(國費)로 할 것을 장계 (狀啓)하였다) ●1510년(중종5)8.29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1511년(중종6)4.27 병조참판(兵曹參判),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전라도관찰 사(全羅道觀察使)를 역임했다. ●1513년(중종8)6,9 동지경연사(同知經筵使), ●1514년(중종9)10.27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호 조판서(戶曹判書)에 올랐다. ●1515년(중종10)4.25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516년(중종11)4.25 좌참찬(左參贊) 겸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조판서(吏 曹判書)가 되었다. ●1517년(중종12)8.22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 ●1518년(중종13)6.28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있을 때 속 동문선(續 東文選)을 찬수(撰修)하고,주청사(奏請使)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북경(北 京)에 다녀왔다.(이때 부사(副使)로 함께 갔던 이자(李滋)가 정사로 갔던 남곤이 병을 얻어 죽을지경에 있을때 지성으로 간호하여 회복 시켰는데,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1519년(중종14)5.2 예조판서(禮曹判書),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즈음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廢政)을 개혁 (改革)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伸寃) 하고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을 등용하였다. 중종의 지우(知遇)를 얻은 신진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 이론을 가르치며 군자를 중용(重用)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을 뿐만아니라, 불교 또는 도교와 관련된 종교행사를 폐지하고 나라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迷信打破)와 성리학적 사회질서 강화 차원에서 소학(小學)교육의 강화는 물론 향약(鄕約)의 전국적인 시행을 추진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반포(頒布)하게 하였으며 덕행있는 사람을 임금의 추천(推薦)에 의거 직접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므로서 유능한 인재를 등용토록 하는 등 개혁정치를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집단(즉,詞章派=勳舊派)의 사장(詞章:詩歌와 文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道學思想)만을 강조하여 벼슬을 오래하며 높은 관직에 오른 훈구파(勳舊派)를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排斥)하는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적인 급진정책(急進政策)을 펼쳤던 것이다.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남곤,심정(沈貞)을 비롯한 훈구파 76명에 대해서 위훈(偉勳)을 삭제(削除) 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해서 소위<위훈삭제사건(偉勳削除事件)>을 야기(惹起)시키고 말았는데, 신진사류와의 알력(軋轢)과 반목(反目)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남곤,심정,이항(李沆),홍경주(洪景舟)가 중심이 되어서 조광조를 위시한 김정(金淨),기준(奇遵)등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사건을 만들었고,궁극적으로 신진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이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내는 숙청(肅淸)을 단행한 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훈구파들이 신진사류를 몰아내기 위하여 만들어낸 사건은 나뭇닢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조광조가 반역(反逆)을 꽤했다는 모함(謀陷)을 말하는데,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의하면: 남곤이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蜂蜜)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를 합하면 조(趙)자가 되는데 즉 조씨(趙氏)가 왕(王)이된다는 뜻)"이라는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기(病己)의 일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경복궁(景福宮) 뒷편 백악산(白岳山) 아래 대은암동(大隱岩洞) 이라고 불리워 지던곳으로, 지금은 청와대(靑瓦臺) 경내에 들어있는 곳인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뛰워 대궐(大闕)안의 어구(御溝)에 흘려 보내어 중종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이를 고변(告變)하기 위하여 남곤,심정,홍경주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서 궐(闕)안에 들어가 중종에게 고하고 무사들을 시켜 조광조를 처치하려 하였으나 정광필(鄭光弼)이 말려 유배(流配)를 보내는데 그쳤지만 남곤은 유배지 능주(綾州)에서 조광조를 사사(死事)하였다고 적고있다. 또 다른 설(說)에 의하면: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後宮)인 것을 이용하여 궁궐(宮闕)안 동산의 나뭇닢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4글자를 쓴뒤 이것을 벌래가 갉아먹게하여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임금께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게 했다고 하기도 하고,남곤과 심정이 경빈(慶嬪) 박씨(朴氏)를 사주하여 경빈박씨가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참소(讒訴)를 한 것으로 전하기도 하는데, 남곤과 심정은 각각 경빈 박씨와 불륜관계(不倫關係)가 있었던 것으로 회자(回刺)되어서 <곤정(袞貞)이 젖>이라는 말도 세간(世間)에 퍼져 있었다. ●1520년(중종15)1.13 50세에 좌의정(左議政), 겸 세자사부(世子師父)가 되었고, ●1523년(중종18)4.18 53세때 영의정(領議政)에 제수되었다. ●1527년(중종22:정해)3.10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만년(晩 年)에 자신의 죄(罪)를 자책(自責)하고 자신의 글로 인하여 화(禍)를 당할까 염 려하여 제자(弟子)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내 글을 전파 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고 했고 또 "내가 죽은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을 하지 말라","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시호(諡 號)를 청(請)하여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한 뒤 평생의 사고(私稿)를 불테워버리고 57세로 죽었는데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은현면(隱縣 面) 봉황암(鳳凰岩) 인좌(寅坐)에 모셔져있다. 사후(死後) 남곤은 당대에 문장이 뛰어났고 필법이 또한 아름다웠을 뿐만아니라 평생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상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재주가 뛰어나서 지론 (持論)이 올발랐다고 평가 받아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러나 ●1568년(선조원년)9.23 기묘년에 사화를 일으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을 제거한 사항을 두고 이황(李滉)과 송순(宋純) 등의 주청(奏請)으로 간적(奸賊)으로 평가되어 "사림(士林)의 분개(憤慨)하는 마음을 시원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으로 시호(諡號)를 포함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였고 그 후에도 신원(伸寃)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역사이래 최고의 소인으로 또 간신으로 지탄(指彈)받고 있다. 문집(文集)으로는 『지정집(止亭集)』, 저서(著書)는『유자광전(柳子光傳)』,『남악창수록(南岳唱酬錄)』등이 있고,시작품 가운데 월주선사(趙州禪師:達磨大師)가 선불교(禪佛敎)를 전하러 오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의 화두를 시로 읊은「신광사(神光寺)」라는 6수의 시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를 옮겨보면: "庭前柏樹儼成行 朝暮蕭森影轉廊 欲問西來祖師意 北山靈風送凄凉 뜰앞의 잦나무는 의젖히 늘어서서/ 하루종일 우뚝한 그림자가 회랑을 도네/ 서쪽에서 조사가 온 뜻을 물으려 하니/ 북숭산(北崇山)신령한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보내오네/"라고 풀이되는데 이 시는 조사(祖師)가 온 뜻이 중생(衆生)의 열뇌(熱惱)를 식혀주는 신령(神靈)한 바람즉, 선풍(禪風)임을 상징하는 선기시(禪機詩) 중의 일품(逸品)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곤이 태어난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는 본래 수동(壽洞) 또는 "한목"으로 불리워지던 곳으로 화악산(華岳山) 분수령(分水嶺)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 서쪽으로 작은 시내(川)를 이루어 그 형상이 항아리(壺) 같기도 하고 배(舟)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하여"옥호동천행주형(玉壺洞天行舟形)"의 승지(勝地)라고 불리워지던 곳인데, 간적(奸賊)으로 자탄받는 남곤이 태어났다고 하여 이곳의 지맥(地脈)을 끊기위해 세곳에 못을 파고"삼지당소(三池塘沼)"라고 했다고 한다. 대항2리 중촌(中村)마을 부근에 있던 두곳의 지당(池塘)은 근년에와서 경지정리(耕地整理)를 하면서 없어지고 대항1리 입구 동산(東山)밑에 이끼낀 작은 못 하나는 지금도 남아있다. "역사는 승리자(勝利者)의 것"이라고 했던가?. 당대에 으뜸가는 문사(文士)로, 또 점필재의 문인으로, -밀양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중국은 물론 일본과도 외교적 업적(?)을 쌓은 한 시대를 경영했던 인물이 -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볼 때-, 다분히 정치적인 패배(敗北)로 볼 수 밖에 없이 매도(罵倒)되고 역사의 그늘속에 묻혀버린다는 것은 고향을 같이하는 밀양인으로서는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남곤의 고향은 분명히 밀양이다.-큰 고을이라고 어찌 착하고 위대한 사람만 살라는 법이 있는가? 하고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살기 마련인데- 행적이 특이한 인물도 고찰(考察)할 필요는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기록에서 관향(貫鄕)을 ?아 의령(宜寧)사람인 것처럼 두루뭉실 넘어가 버리는 일이나 인물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해 보지도 않고 힘의 우위를 ?아 내팽개쳐 버리는 비급한 처사는 분명히 바로잡고 넘어가야 할 일이고, 늦었지만 남곤을 재조명(再照明)하는 일은 우리 밀양인들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손정태밀양문화원이사(신문사sms2280@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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