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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의 선구자(1)
약산 김원봉 장군
[2004-01-25]
 
 
 
<편집자 주> 본사 창간 14주년을 기념하고, 밀양시가 추진하고 있는 (가칭)밀양독립운동기념관 및 기념공원 조성사업에 즈음하여 기대와 찬사를 보내면서, 밀양이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자이신 약산 김원봉 장군의 투쟁사를 연20여회에 걸쳐 연재한다. 밀양문화원 이사이시며 향토사학가이신 청오(靑吾) 손정태(孫正泰)선생께서 심혈을 기우려 집필하실 김원봉(金元鳳)선생의 일대기는 항일의열투쟁의 중심에 섰던 약산(若山)의 기백과 애국심이 살아 넘침은 물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하신 밀양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면면들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되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 연 재 순 서 - 1 . 머 릿 말 2 . 약산(若山)의 어린시절 1)약산의 출생과 성장기 2)약산의 신학문(新學問) 수업기 3 . 의열단(義烈團)의 창단(創團) 4 . 밀양폭탄사건(密陽爆彈事件) 5 .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폭탄사건 6 .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密陽警察署)폭탄사건 7 . 김익상(金益相)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폭탄사건 8 . 상해(上海) 황포탄(黃浦灘)사건 9 . 김상옥(金相沃)의 격전(激戰)사건 10 . 김지섭(金祉燮)의 동경(東京)이중교(二重橋)폭탄사건 11 . 고인덕(高仁德)과 경북(慶北)폭탄사건 12 .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입학과 약산(若山)의 새출발 13 . 나석주(羅錫疇)의 동척(東拓)폭탄사건 14 . 의열단(義烈團)의 해체(解體) 15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개교(開校) 16 .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결성(結成) 17 .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창립(創立) 18 . 임시정부(臨時政府) 군무부장(軍務部長)시절(時節) 19 . 약산(若山)의 귀국(歸國)과 국내활동(國內活動) 20 . 맺 는 말 1.머 릿 말 김원봉(金元鳳)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다. 좀더 사정을 아는 사람은 그가 치열하게 무장독립투쟁을 해온 사람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치열하게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해 왔으며 이 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하였던가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민족해방운동사를 다룸에 있어 주로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으로 한정지었던 정치적 사상적 제약조건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사를 논할 때 약산(若山)의 업적을 제외시켜 버리면 그 일부(1919-1948)를 올바르게 서술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족적(足跡)을 남긴 그를,-밀양이 낳은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자(先驅者)를-잃어 버린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크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년전에 중국에서 만나본 일부 학자들과 태항산전투(太行山戰鬪)에서 석정(石正:尹世胄)의 최후를 지켜본 최채(崔采)선생이나,「최후의 분대장」의 저자 김학철(金學鐵)선생도 백범(白凡)과 약산(若山)을 동격의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인물을 잃어 버리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한없이 마음이 무거웠고, 최소한 약산의 고향인 밀양에서 만이라도 사상의 좌·우를 따지기에 앞서 애국애족(愛國愛族)이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목표였던 행동하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재평가가 반드시 필요하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였다. 밀양읍 내이동 901번지에서 출생하여 의열단 단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겸 광복군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으로서 민족해방운동에 매진해 왔고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으로 활동하였던 그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던 것은 1948년 4월 남북협상회의를 위하여 월북하여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한 이후부터인데, 봉건왕조와 외세의 침탈로 인하여 항상 헐벗고 굶주리던 민중의 이익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보주의자였고, 간악한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민족주의자였으므로 진보적 민족주의자란 평가를 받는 그가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져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에 필자와 같은 범부(凡夫)가 다루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무모한 시도가 될지도 모르지만 재현의 매서운 질책을 감수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약산의 일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시기를 거쳐 1945년 귀국할 때까지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였음이 분명하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해방 이후 이 땅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싸움에 휘말려 결과적으로는 공산주의자로 각인(刻印)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마지막으로 선택한 북한의 공산정권에서 조차도 끝내 수용되지 못하고 숙청(肅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질뿐,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을 볼 때, 진보적민족주의자이면서 진정한 애국자였던 그의 말로가 너무나 비참하고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옛말에 숲이 깊으면 물이 많고, 온갖 짐승의 안식처가 된다고 했듯이 밀양에는 약산이라는 큰 인물이 계셨으므로, 당시의 우국지사들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였고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의열단원 등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약산에 대한 과장된 부분도 많아서 ¨축지법을 썼다¨거나, 1918년 9월 마지막으로 밀양을 떠나신 이후 1946년 2월 26일에야 돌아오신 그를 두고 “왜경들이 부북면 감내(甘川)리 57번지로 이사한 약산의 부모님이 계신 집을 포위하여 집에 들른 그를 체포하려 하자 똥파리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는 등의 이야기가 거의 사실처럼 전해진 경우도 있으나 이는 모두 유언비어일 뿐, 중국으로 망명 이후 해방시기까지 한번도 귀국한 적이 없고,“6.25한국전쟁 중에도 그가 서울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이야기도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했음이 자료조사 과정에서 얻어진 내용이다. 이 글을 쓰면서 「약산과 의열단」(박태원),「의열단」(송건호),「아리랑」(님웨일즈, 김산),「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김원봉 연구」(염인호),「백범일지」(김구),「20세기의 신화」(김학철),「최후의 분대장」(김학철),「광활한 대지우에서」(최채),「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김중생),「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강만길),「조선의용군사」(최봉춘)등등의 서적을 참고하였고, 「조선의용대 통신」(조선의용대 기관지),조선총독부재판소의 관련 공판기록,「중외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 등 신문과 각종자료 및 약산의 막내여동생 김학봉(金學鳳)의 증언을 토대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다음호에 계속>

손정태이사(신문사sms2280@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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