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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행운, 프로를 만나다

[2017-12-04 오전 10:55:00]
 
 
 

가을 내내 전국이 축제와 공연, 각종 기념회, 전시회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곳곳에 현수막이 걸리고 포스터가 붙었다. 내 책상위에도 초대장이 제법 수북이 쌓였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면서 그 많은 공연과 축제도 전시회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하다. 또 내년을 기약하면서.
 

잊고 지내왔던 추억속의 기억인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 때의 행복했던 작은 감동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다름 아닌 라디오 연속극을 듣던 시간들과 한 밤의 음악편지란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을 들었던 기억들이다. 연속극을 들으며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감미로운 성우의 목소리와 귀에 익은 음악들을 들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잠속에 빠져들던 시간들. 연속극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는 내 머릿속의 명장면 하나.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TV나 영화관의 스크린을 통해 보았지만 그 옛날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면서 나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그 한 장면만큼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없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들판을 가로질러 기차가 달리는 장면을 전해주는 효과음과 성우들의 해설과 대사. 기차가 눈 쌓인 어느 작은 역에 머물렀다가 다시 떠나면서 젊은 연인이 긴 이별을 하게 되는 장면을 내 머릿속에 마음껏 그렸던 것이다. 스크린에 보이는 것은 내가 상상하는 것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도 소설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실감하고 있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전문가는 프로가 아니다. 감동은 반드시 관객 앞에서 모습을 보이면서 행위나 표정 등으로 연기 해야만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긴 예를 들어보았다. TV가 일반화되기 전 얼굴을 모르는 국내외 여러 가수들의 노래만을 듣고도 우리는 그들을 좋아했고 더러는 감동받고 가슴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을 프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요즘은 소통의 시대이고 인터넷이나 TV, 신문 등을 통해 쉽게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삶의 영역에서 심심찮게 전문가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전문가라 함은 여러 사람 앞에서 강의하고 발표하고 자신의 식견을 전파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말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전문가를 통해 프로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문장으로 그 차이를 콕 찍어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 그리고 관인엄기(寬人嚴己). 이 두 문장은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하라는 내용으로 같은 의미이다. 흔히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그리고 많은 사람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CEO들의 기본 품성으로 자주 거론하는 내용이다. 특히 요즘처럼 정치적 이슈로 서로 간 갈등이 많은 상황에서 자주 제기되는 화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을 조금 더 폭넓은 의미로 접근해서 사람의 됨됨이나 지도자의 행동기준을 넘어 겸손과 포용 그리고 프로의 판정기준으로까지 확대 적용 해보고 싶었다. 프로는 자신의 기술을 엄격하게 평가하고 남의 기술을 후하게 평가하는 겸손이 바탕이기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 나의 가까이에 항상 프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프로는 쉽게 남의 기술을 평가하지 않고 가르치려고 나서지 않으며 자신을 뒤로 감추는 겸손한 미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가까이 프로가 있어도 그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어느 시 낭송대회에 가보았다. 개회식에서 대표자의 인사말과 여러 사람의 축사와 격려사가 있었다. 단순한 축하의 인사가 아니라 시낭송의 이론을 곁들여 장황한(?) 내용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수십 명에 달하는 내빈 소개가 있었고 중앙 진출 인사가 보내 온 긴 내용의 축전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어내려 갔다. 우리 모두는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압권은 대회가 끝난 후 마지막 순서에 해당하는 심사위원장의 심사평이었다.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참가자들의 초조한 심정은 안중에도 없었고 행사가 끝난 후의 또 다른 일정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간에 쫒기는 심정은 전혀 고려치 않았다. 예정된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겨가며 거의 강의 수준의 길고 긴 심사평을 했다.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들어오던 내용들이었다. 미리 말 할 내용을 잘 요약해서 핵심만을 발표했으면 오 분이면 족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들도 자신의 생각이 마치 정답인 것처럼 확정적인 어조였다.
 

인지주의 교육학자 브루너는 어떠한 어렵고 복잡한 내용의 지식도 듣는 사람의 수준에 맞게 재구성하여 제시하면 쉽게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칠 내용에 대해 깊은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며 자신이 그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했다. 프로는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상대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만이 옳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 겸손이 몸에 배여 있다. 또 심사평 후 그 분의 시낭송이 있었는데 참 잘하는 것 같았지만 프로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음은 왜일까(?)
 

얼마 전 음악을 좋아하는 몇몇 사람이 그들끼리 좋아서 마련한 작은 콘서트에 갔었다. 그냥 큰 기대 없이 편한 마음으로 참석했다. 그 흔한 내빈소개나 축사는 물론 사회자도 없었다. 다만 한 장짜리 프로그램만 입구에 놓여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자 출연자 들이 차례로 작은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의 이름과 연주 곡명을 소개하고 연주나 노래를 했다. 그런데 그 콘서트에도 초대 된 연주자가 한 분 있었다. 장황한 자신의 소개 대신 혼신의 기를 모아 연주에 임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매력을 느꼈다.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연주자를 보지 않고 소리에만 집중하니 더 좋은 음악을 만날 수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녹음된 음악과 라이브는 명확히 구분 되었다. 그의 연주는 가히 감동적이었다. 두 곡을 이어서 들은 뒤 우리는 앵콜을 청했다. 그런데 그 연주자가 하는 말 “저는 두 곡 이상 연주할 실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더 이상 연주하는 것은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무례함일 것 같아 그만 내려갈까 합니다”라고 말하고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갔다.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이 작은 연주회에서 프로를 만나는 행운을 안았다. 참 행복한 저녁이었다. 그의 매력적인 연주 소리를 나는 아직도 가슴속에 담고 있다. 프로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다. 언제쯤 또 내 가슴을 감동으로 적셔 줄 프로를 만날 수 있을까?

정상진/(前)밀양초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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