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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2018-06-21 오전 9:51:00]
 
 
 

은근 슬쩍 부드럽게 다가왔던 봄이 화려한 빛깔로 천지를 물들이더니 벌써 우리 곁을 지나갔다. 이제 그라데이션(gradation)의 날들은 가고 직선으로 내리쬐는 강열한 햇볕이 대지를 데우고 있다. 부드럽고 매혹적인 보라색 아이리스가 지고 그 옆에 빨간 백일홍과 채송화가 당돌하게 피어 해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숨을 곳은 없다. 뜨거운 햇살아래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맞서서 자신을 지켜 갈 수 있는 강인한 꽃과 잎과 나무들이 있을 뿐이다.
 

오늘도 폭염으로 재난 안전에 관한 방송이 있었다. 때 이른 더위로 미처 여름 맞이 준비가 되지 않은 꽃과 잎들 그리고 여린 채소들은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과의 싸움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여름 꽃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 하루에도 몇 번 씩 물을 주고 싶다. 그래도 꾹 참는다. 자생력을 길러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최소한의 도움만 주는 정도로 물을 준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장점에 도달하지 않은 식물들은 한 참 자란 뒤에도 사람의 손길이 뜸해지면 언제라도 고사(枯死)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핀 꽃들은 오래도록 화려하고 예쁜 빛깔을 지니게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힘 있는 정치인의 부탁으로 공기업의 신입사원 채용 시 입사시험 성적의 순위가 바뀌었다는 소식. 금융권의 직원 채용에서 은행장의 입김으로(누군가의 압력에 의한 입김 일 수도) 또 순위가 바뀌었다는 소식. 이 잔인한 소식들을 접하면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분노할까? 그리고 기성세대를 불신할까를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성공은 무엇으로, 어디를 통해 다가오는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설익은 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자리. 금수저 말이다. 온실에서 주어진 물과 영양분으로만 자란 식물이 노지에서 자란 식물의 생태를 알지 못함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들만의 온실이 아닌 만인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음 또한 당연지사다.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이 없어도 자신의 의지를 수정할 생각은 없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냥 말로 행동으로 무조건 휘두를 뿐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음은 불문가지다. 우리 집 정원의 꽃에 비유하면 자생력을 갖지 못해 고사(枯死)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남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공적 자산인 기업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기도 하니 비뚤어진 자식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비록 과거에 급제하였더라도 자식의 인품에 믿음이 가지 않으면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간곡히 만류했던 우리의 현명한 선조들이 어디 한 둘이었으랴. 자식의 잘못된 처신으로 인해 나라와 백성들에게 큰 해를 끼치는 것을 염려하기도 하였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식의 더 나은 앞날과 무사(無事)를 위한 부모의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금에 뉴스로 다루어지는 어느 한 예를 두고 말 할 처지는 아니다. 이 땅에 자기 자리가 아닌 직분을 차지하고 있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전혀 그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최고 책임자로 앉아있는 경우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감당치 못할 자리를 스스로 탐내었으니 주어진 자리를 마다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는 1969년 일체의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고 경영 일선을 떠났다. 회사는 창업주의 가족이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운영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유일한 박사의 창립이념을 가장 가까이서 배웠으며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회장까지 지낸 연만희 씨는 유일한 박사에 대한 회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사 내에 친인척들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로인해 받을 수 있는 특혜는 전혀 없었고 회장님의 그 신념은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었다고.
 

제법 탄탄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A회장은 남매를 두었는데 그 회사에는 본가와 처가를 막론하고 4촌 이내의 친인척은 한 사람도 없다. 그의 아들은 올해 40줄에 들었는데 자영업을 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 그는 자식들에게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으며 재산도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 지금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인물 중에서 경영 후계자를 살펴보고 있으며 마땅치 않으면 전문경영인을 초빙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도 자식들은 너무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부모의 재산이나 바라보고 있는 그런 자식들로 키우지 않았고, 둘 다 생각이 건전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평범한 자식이며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니 그것도 나의 복입니다. 그러나 부모 된 마음에 자식사랑의 조그만 표시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우리 집 울타리 안과 밖은 접시꽃이 많다. 바깥쪽 길에 있는 접시꽃은 조금 경사가 있어 물이 흘러내리며 그 바닥조차 아스팔트로 매워져 있어 뿌리 쪽으로 물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봄이 되어 집안에도 길 쪽에도 접시꽃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관심을 갖고 비교 관찰했다. 좋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또 내가 자주 물과 거름을 주기도 하는 집안의 접시꽃과 아무도 돌보지 않고 아스팔트 한쪽의 경사진 곳에 틈을 비집고 자라난 접시꽃이 조금도 차이가 없이 자랐고 꽃도 똑같이 아름답게 피웠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홀로 자란 바깥의 접시꽃들은 이 뜨거운 유월의 태양과 마주하면서 기죽지 않고 지금도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다.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능력만큼 인정받으며 살아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그늘을 내주어서도 안 되고 그러한 그늘을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도 밖에는 유월의 강열한 태양과 마주한 꽃과 식물들이 여름나기를 위해 힘겹게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정상진/(前)밀양초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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