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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창의유적기념비 어디로 갈까?
역사의 현장을 찾아
[2018-09-07 오후 1:46:00]
 
 
 

사진1. 지금의 작원관과 위령탑 모습

2008년 석골사 초입에 자리 잡은 임진왜란창의유적비가 자리를 옮겨야 할 상황에 처해졌다.
즈음하여 유적비의 과거와 내일을 살펴보기로 한다.

 

⊙임진왜란과 밀양
조선 위정자들의 당파싸움과 예지력을 잃은 안일한 국정운영으로 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국토. 그 국토 위에 수많은 민초들이 피를 토하고 뿌려야 했던 7년 전쟁.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와 서울을 향한 북진이 시작됐다.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유린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선조임금은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하는 치욕의 사태에 이른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협정에 들어갔고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입한다. 결국 이들은 육지에서는 조명연합군에게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은 끝을 맺는다.


밀양은 동래-양산-밀양-청도-대구로 이어지는 요충지이며 밀양의 진입 시작에는 삼랑진의 작원관이 있다.


일본의 제1군인 소서행장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양산을 거쳐 18,0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작원관에 도착했다.


4월 17일 그날은 화창한 날씨였고 진달래, 철쭉이 만발하여 실로 우리의 자연은 아름다웠다.


일본군의 작원관 공략이 시작되었지만 밀양부사 박진이 이끄는 300여 명 군사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주춤했다.


일본은 우회공격을 결정하고 17일 한밤중에 신불암고개로 일부 부대를 침투시켰다.


안개가 자욱했던 18일 병력이나 지리적으로나 우세한 위치를 차지한 일본군이 배후에서 맹공격을 시작했다.


앞에는 일본의 본군이 있으니 나아갈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싸웠으나 엄청난 공세의 협공에 몰살의 지경에 이르고 만다.


결국 박진 부사는 밀양성으로 퇴각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퇴로를 제대로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과 일본군의 숨 가쁜 추격.


결국 수심을 가늠하지도 못한 채 밀양강의 종병탄을 건너다 대부분 군사들이 익사하고 말았다.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8일엔 그 몸서리치던 항전의 자리였던 삼랑진읍 검세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작원관에서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밀양성에 도착한 박진 부사는 흩어진 군사를 재정비하여 항전의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 大부대의 진격으로 또다시 퇴각의 뼈아픈 결정을 내린다.


무기창고와 식량창고를 파괴한 다음 퇴각하여 지금의 석골사 초입 동네인 석동(石洞)에서 방어진을 구축했다.

 

⊙밀양 최초의 의병
일본군이 밟고 지나간 밀양 땅은 초토화의 형국이었고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시설은 물론 문서 및 자료가 철저히 소실되는 처절함을 겪어야 했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일본군을 피하여 부모와 아이를 이끌고 등짝에 짐을 메고 골짜기를 찾고 찾아 피신을 떠나야 했던 가련한 민초들.


굶주린 배를 달래가며 자연의 섭리를 따라 흙에 묻혀 조선의 하늘을 지붕 삼았던 백성들의 울부짖음. 그저 농·공·상으로 입에 풀칠하며 꼬박 꼬박 나라에 세금을 바치며 위정자들의 선한 정치와 굳건한 나라를 갈망했던 여린 백성들.


그들이 스스로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의병이다.


죽어서도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할 무명의 백성들. 자신들이 밟고 살았던, 자신들이 우러러보았던 땅과 하늘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된 것이다.


박진 부사가 주둔하던 바로 그 석동에서 밀양 최초의 의병들이 일어나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수많은 생명들이 허망하고 처참하게 쓰러져가는 현장에서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저들의 결의가 애달프기까지 했을 것이다.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차이도, 연령의 차이도 없이 분분히 일어났던 의병이란 이름이 차라리 가슴 아리도록 눈부시게 느껴진다.

 

⊙임진왜란창의유적기념비
피를 토하고 자신의 나라 조선의 땅속으로 목숨을 심었을 저들의 처절한 비명과 아우성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마저 흔적 없이 사라진 그 땅, 수많은 영혼들의 성스런 피로 얼룩진 그 땅 위에 우리는 오늘도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


결코 잊을 수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들의 아픔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지난 2008년 밀양문화원은 산내면 원서리 604번지 사유지 약99㎡에 ‘임진왜란창의유적기념비’를 건립했다. 설명문에 몇몇 분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긴 하지만 나라를 위해 이름도 없이 산화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저들의 숭고함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2017년 주민들의 이전요구에 따라 밀양문화원은 이사회를 거쳐 총회에 보고하고 산내면 원서리 1014-8번지의 약40㎡의 국유지에 도로점유허가 등 이전 준비에 착수했다.


비록 임진왜란창의유적기념비가 도로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지만 이름 없는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과 아픔의 흔적이 그들의 찬란한 이름이 되어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사진2. 2008년 건립된 임진왜란창의유적기념비
사진3. 임진왜란창의유적기념비 이전 예정지

 


 
 


 

박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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