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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디자이너

[2018-09-20 오전 9:25:00]
 
 
 

9월 하늘이 참으로 화창하다. 드넓은 창공에 두레박을 던져 물 한바가지 퍼 올릴 수 있을 것처럼. ‘This was a very big summer-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유난히도 무더웠기 때문일까 릴케의 시구가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다. ‘It is time- 때가 왔습니다’ 라는 간결한 두 문장의 이미지와 울림은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단숨에 압도하는 힘을 지녔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에선 어느덧 서늘한 겨울의 기운마저 묻어 있어서 가을은 괜히 외로운 계절이기도 하다. 낙엽이 흩날리는 거리에 잎마다 새겨진 사연들을 외면한 채, 우리는 저마다 일상의 무게들을 또다시 저 이파리들과 함께 날려버려야 할 시간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주름지고 텅 빈 가슴은 도대체 무엇으로 채운단 말인가. 하릴없이 사소한 일에도 눈가가 자주 젖는 것은, 너덜너덜한 영혼을 감싸줄 모포 한 장 없이 다가올 추위에 맞서야 하는 서러움 때문이기도 하리라. 박재삼의 시구처럼 그야말로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가 바로 요즘이 아닌가 한다. 대개의 경우 이런 날에 시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단어들은 그대로 시가 된다. 그래서 외롭고, 쓸쓸하고, 가난한 영혼일수록 시詩가 출몰하기 쉬운 조건이라고들 하나보다.
 

구겨 넣어 두었던 언어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에서 시어가 되어 영롱히 맺혀 알알이 가슴에 박힌다. 바야흐로 시가 내게로 와 안기는 시간. 상처받은 영혼이 詩에 의지에 고달픈 세월을 지나가는 순간들이다. 그렇게 시는 내게 바람막이가 되어주었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고난의 시간들을 피하게 해준 챙이 넓은 우산이기도 했다. 불볕 한 가운데로 내던져진 상실의 虛氣는 누가 치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처연하기만 했다. 오직 가림막이 되어준 넓디넓은 詩의 그늘만이 유일한 도피처가 아니었던가.
 

시와 만날 때면 늘 세련미 넘치는 언어 디자이너로서, 단어가 가진 무게감과 이미지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단어가 품은 의미와 소리, 모양새가 가진 깃털 하나하나의 숨결에서 떨리는 움직임까지 감지하려고 했다. 그런 날선 촉각은 살아 있음의 경이로움으로, 누구에게도 설명할 길 없는 전율과 황홀, 마침내 시인이라는 자각을 넘어서 스스로를 ‘언어 디자이너’라 칭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부심 하나만은 남부럽지가 않다. 이런 나의 못 말리는 황홀경은 시를 쓸 때 특히 그러하다. 단어를 고르고 배열하는 과정의 아름다운 스트레스트는 만리향 은은한 정원을 거니는 것처럼 그윽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불멸의 고민이라 할만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것 하나 디자인과 무관한 것이 없는 듯하다. 결국 디자인 또한 소통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詩로 소통하고자 하는 나만의 스타일을 디자인 하는 것. 그것은 나의 눈부신 자존심인 동시에 나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주문(呪文)이자 기도이기도한 셈이다. 언어디자이너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함의하는 자기성찰과 내적 기만을 포괄하는 아이러니 사이를 오가는 나의 이중적 사고와 대적하느라, 나의 내면세계는 카오스 상태의 연속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새는 연못가에서 자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라는 시를 지어놓고 두드린다 敲라고하는 것이 좋을지, 민다 推고 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느라 나귀 위에서 두드리는 동작과 미는 동작을 반복했다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퇴고(推敲)에 얽힌 이야기는 언어디자이너들의 고충을 잘 대변해준다. 일필휘지(一筆揮之)도 좋지만, 읽고, 쓰고, 다시 보면서 단어를 배열하는 글맛이야말로 문학하는 즐거움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희숙/시인,문학평론가

 
 
 
이선애 가을 향기가 나는 글입니다.^^
단풍든 잎이 봄꽃보다 붉은 가을을 기다립니다.
2018-09-20 22:12
이용철 좋은 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언어디자이너님.^^ 2018-09-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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