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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지평선 1권(5)
제1장 산사를 다녀오던 날
[2018-12-28 오전 11:15:32]
 
 
 
두 친구(5)
 
그와 오랜 친구인 운사도 그러한 중산의 의중을 잘 읽고 있는 듯, 다 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응수하는 것이었다.
 “부러워할 게 뭐 있겠나? 자네보다 엄격하지 못한 내 성격 탓인 것을. 유사 이래로 왜놈들이 시시때때로 우리 민족에게 가해 온 수많은 만행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서 하루도 마음 편안하게 살 수가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기야…. 망해 버린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무난하게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은 자네가 말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딴은 가장 무난할지도 모르지! 현실은 현실로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다음 일을 도모하면 될 테니까 말일세!”
 중산은 아이들의 장래에 관한 태중언약이 무산된 채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 자기들 둘 사이가 못내 아쉬운 듯, 다시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슬며시 걸음을 멈추고 만다. 어디선가 흥겨운 장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 흥겨운 장구 소리는 발밑으로 까마득하게 떨어진 절벽 아래의 응천강 건너편 송림가의 백사장에서 아까부터 들려오던 민중들의 그 농악 소리가 아니었다. 한량들이 끼고 노는 기생들의 춤사위에나 어울릴 법한, 그 흥을 타고 뚜당땅거리는 몸에 휘감기는 듯한 장구 소리는 그들이 한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저 길 아래의 영남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였다.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자기네의 식민지 경영에 협조하라고 갖은 협박과 공갈로써 기부금을 뜯어 가면서도 오히려 큰소리를 땅땅 치며 잔뜩 주눅이 들게 만들더니만, 드디어 단오맞이 관제(官制) 관민 합동 연회의 마무리 단계인 여흥이 시작된 모양이군!”
 신음을 토하듯이 중산이 내뱉는다.
 “성안의 청루나 요릿집에서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이!”
 민심을 들끓게 한, 고을 안의 유력한 토호 유림들과 지역 유지들을 강제로 참여시킨 정략적인 관제 관민 합동연회라 운사도 잘 알고 있었는지 영남루 쪽을 내려다보며 귀를 세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멀리서 풍물 소리가 들려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까 무봉사 절간을 나설 때부터 군중들의 요란한 함성과 함께 이따금씩 농악꾼들의 흥겨운 풍물 소리가 시원한 바람결에 실려 오곤 하는 것도 단오절이면 으레껏 접하게 되는 이 고을의 오랜 명절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의 얘기일 뿐, 보나마나 지금은 저 고목이 우거진 절벽 밑으로 뚝 떨어진 응천강 건너편의 삼문리 강변 솔숲 백사장에서는 황소를 상품으로 걸어놓고 마을끼리 겨루던 그 씨름판이나 소싸움 대회를 비롯한 국궁대회가 전격적으로 취소되어 버린 채 힘없는 민초들끼리 그들만의 반쪽 잔치로 형편없이 축소되어 김이 빠진 나머지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을 게 뻔하였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삼대 명절 중의 하나인 오월 단오절이다. 일년 중 양(陽)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게 겹친다는 이 단옷날은 마을마다 부락마다 양반가에서는 차례를 올린 뒤, 붉은 색의 단오 부적을 붙이거나 단오선(端午扇)을 나누며 차륜병(車輪餠)이라고 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쑥떡과 화채 같은 초여름 음식을 즐기면서 조용히 보내지만, 농사를 짓는 민가에서는 보다 다양하고 요란하게 단오 명절을 쇠는 것이다.
 일찌감치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빗은 다음 붉고 푸른색의 옷을 입고, 창포 뿌리를 잘게 잘라 만든 비녀에는 수(壽)?복(福) 두 글자를 새기고, 액막음의 뜻으로 그 끝에 붉은 색칠을 하여 머리에 꽂아 단오장(端午粧)을 하고 하인들이 매어 놓은 후원 깊숙한 나무 그늘 속에서 추천을 은밀히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반가의 여인네들과는 달리, 여염의 부녀자들은 마음껏 몸단장을 하고서 아예 집밖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구밖의 정자나무 그늘에서 그네를 타거나 산과 들에서 약쑥과 익모초를 채집하며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간 음식 들을 나누어 먹으면서 하루해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민가의 남정네는 물론이요 양반가의 머슴과 하인들도 일손을 놓고 단오 행사에 나가 한바탕 명절 기분을 만끽하고는 강가로 나가 천렵을 하거나, 저들끼리 씨름이나 풀싸움 같은 들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길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단오 명절의 오래 된 풍습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오 명절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옛날의 일이었다. 왜놈들이 많은 민중들이 한데 어울리는 대중집회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는 명절 쇠기도 예전 같지가 않아서 옛날부터 일반 민초들과 모모한 고을 안의 한량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가운데 관민 합동으로 <밀양 백중놀이>와 더불어 국궁(國弓) 대회며 소싸움대회, 씨름 대회가 거창하게 열리곤 하던 강 건너 삼문리 모랫벌에서는 아침나절부터 일반 민초들만 참여한 가운데 맥빠진 백중놀이와 마을 대항의 씨름판 정도만 겨우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처럼 오늘 하루 자유의 몸이 된 머슴, 하인배들은 벌써부터 반쪽자리 행사에 흥을 잃고 배다리 아래의 진장 쪽 모랫벌에 몰려가서 저들끼리 천렵을 하고 있는지, 모래알 같은 사람의 그림자가 멀리 응천 강변을 따라 점점이 가물거리는 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오늘같이 뜻 깊은 날에 저런 꼴을 보게 되다니…!”
 중산은 응천 강변에서 시선을 돌려 오솔길이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발밑 능선 아래의 영남루 쪽을 눈여겨 바라보다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귀골풍의 얼굴에 일순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간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천년 고목들이 들어찬 푸르른 수풀 사이로 만경창파를 헤치고 수면 위로 떠오른 고래 등처럼 시커멓게 드러난 영남루의 거창한 기왓골과, 정략적인 관제 주연이 한창 베풀어지고 있는 그 아래 누대 위의 연회장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빤히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다.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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