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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아랫목

[2018-11-01 오전 11:11:00]
 
 
 

내 유년의 아랫목에는 늘 어머니와의 추억이 함께 했다. 어머니는 김치를 담가놓고, 익었나 덜 익었나 들여다볼 때면, 소녀처럼 두 손을 모으고,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하시며 뚜껑을 열곤했다. 한 남자의 열렬한 사랑을 온몸으로 받은 여성만의 자존과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한없이 부럽고 애틋해서 늘 가까이에서 동경하며 시샘했다.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자기 집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어머니의 집을 도우려고 낙동강을 헤엄쳐 다닌 사나이 중의 사나이셨다는데, 작고 왜소한 체구 어디에 그런 열정이 숨겨져 있었던지. 무엇보다도 존경할 일은 4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이었던 아버지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서 모셨다는 점이다. 아버지 위로 형이 셋이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시부모님을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었던 어머니는, 한 번도 넷째 며느리인 내가 왜 하는 불만을 표하는 모습을 보인 일이 없었다.
  

내가 젖먹이였을 때이니 아버지 나이 고작 서른이었을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시고 도시를 떠나, 낙동강가에 땅을 사서 직접 집을 지으셨다. 뒤뜰에 사과나무, 배나무, 대추나무를 심었고, 마당가에는 살구나무, 자두나무, 석류나무, 무화과, 작은방 창가엔 오동나무도 심어져 있었다.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기침이라도 할 때면, 아버지는 참새를 잡아 오시기도 했다. 참새를 달여서 먹으면 기침에 특효라는 민간요법 때문이었다. 현관 입구에 있던 포구나무의 열매는 동생들이 만드는 새총의 탄알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나와 동생들이 나무에 반짝이를 두르고 솜뭉치를 사이사이 끼워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기도 했다. 싼타 할아버지가 나에게 더 큰 선물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면서.
  

외할머니댁을 거쳐 학교에 가는 길은 더욱 멀고도 재미난 여정이었다. 철길 건널목 있는 곳으로 안전하게 다녀야 한다는 부모님의 다짐을 어기고, 가끔 위험한 철길을 넘어 지름길의 유혹에 빠져보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길과 골목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가다가 비를 만나면 연(蓮) 잎을 따서 우산으로 쓰고 갔던 일. 어느 집 담벼락에 핀 접시꽃을 한 잎 떼어, 잎 끝을 조심히 갈라 코끝에다 붙이고는, 닭이 되었다면서 “꼬끼오, 꼬꼬댁 꼬꼬” 팔을 나풀대며 뛰어다닌 일들은 언제나 봄볕처럼 따스하게 기억되는 내 유년시절의 황금보다 귀한 아랫목인셈이다.
 

마을에서 먼 거리에 있었던 우리 집은 대문도 없어서 누구든 자유로이 드나들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집을 지켜줄 견공들이 마당 곳곳에 있었는데도 녀석들이 짖는 소리를 듣는 일은 흔치 않았다. 많을 때는 개와 고양이를 합쳐 7마리를 키울 때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마당 한켠에 주차해놓은 아버지의 빛나던 애마 검은 승용차와 함께 우리 집엔 탈것들도 많았다. 자전거, 오토바이, 리어카까지. 남동생 둘을 리어카에 태우고 마당을 돌아다니며 놀기도 했는데, 그때 담벼락을 들이받아 생긴 상처는 아직도 나의 오른쪽 손가락 세 개에 걸쳐 훈장으로 남아 있다. 고운 자갈이 깔려있었던 넓은 마당 한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있었는데, 괜히 화가 나는 날이면 나는 그 플라타너스를 타고 올라가, 가지 사이에 오래 앉아 있곤했다.
 

누구는 세월을 유수(流水)와 같다고 하지만, 정말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는 걸까. 왕년의 진짜 사나이였던 아버지는 팔순을 넘기고부터 부쩍 쇠약해지셨다. 부모님이 늙어가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일은 나에게는 무겁고도 슬픈 통증이다. 유별난 효녀여서가 아니라, 나에게 쏟아주시는 그 따뜻한 눈길과 손길들 없이, 냉담한 이 세상에 홀로 남아 있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날이 싸늘해지니 감기에라도 걸리실까봐 늘 노심초사 마음을 부여잡고 있는 심정은 참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회한으로 나 자신에게조차 해명이 불가하다. 지난겨울 혹한에 어머니가 열흘이 넘도록 감기를 심하게 앓았기에, 나는 이제 겨울의 낭만은 잃은 느낌이다. 그저 어르신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뿐. 국화가 한창이라고 울긋불긋 단풍 구경들 가자는데, 머리가 허옇게 센 아비를 두고는 꽃도 싫고 단풍놀이도 다 싫어 하릴없이 우울하기만하다.
 

내  유년의 시간과 공간을 봄날의 따스한 볕과 함께 가꾸어 주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으로, 나는 용케도 귀한 인연들 속에 사뿐히 안착했고, 여러 수호천사들의 비호(庇護)를 받으며 보람찬 일상을 보내고 있다.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애쓰면서.

정희숙/(사)기회의학숙총무이사

 
 
 
이명래 아름다운 유년시절에다
살구맛 쳥포도맛이 왜 나지요
2018-11-07 05:33
이선애 유년의 아랫목은 살면서 세속의 냉기로 손이 곱아들 때 그 아래 손을 녹일 수 있고 다시 일어설 힘을 만들어 줍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2018-11-05 08:42
🤣 델러는 갈색 폭포수처럼 눈부시게 흘러내리는 Long hair를 잘라팔아 짐의 시계줄을 사고 짐은 아끼던 시계를 팔아 그녀의 머리빗을 사지요. 소피의 모습은 오 헨리의 ' X-mas P
resent'를 연상케 합니다. 👓🕶
2018-11-03 09:55
배일송 소피의 모습은 Sophie's Choice 소피의 선택의 메릴 스트맆과 아주닮 았어요. 저는 어제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원작 ' 와가하하노 시루스'(記)를 봤어요. 소피가 어머니얘기를 하니 그 영화가 생갹납니다.
2018-11-02 17:25
일송 배철웅 멋진 에세이군요. 그때는 낙동강물도 크리스털처럼 맑았지요. 흰모레톱 멀리 강나루가 보이고. 그런 곳에서 컸으니 소피의 심성이 그럴게 곱지요. 소피의 사진, 눈이 부실지경입니다. 그 아름다움, 특히 물결치는 머리칼...! 2018-11-0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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