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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지평선 1권(7)
제1장 산사를 다녀오던 날
[2019-01-25 오전 9:25:28]
 
 
 
두 친구(7)

그러면서 중산은 책망이라도 하는 듯이 운사를 이윽히 바라본다.
 “이보게, 중산! 이제 생각해 보니 나의 유학생활이 자네에게 막대한 심려를 끼치지 않았는지 심히 걱정이 되네 그려! 혹시라도 예전보다 많이 달라진 나의 이런 외양이 자네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시게. 하지만, 이 손태준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을 위해서 죽었으면 죽었지, 자네의 그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욕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과히 염려하지는 말게나!”
 운사는 심기가 불편해진 중산에게 어떤 확신이라도 시켜주려는 것처럼 그의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굳게 힘을 준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두고 의심을 하다니,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한마디 던져 놓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중산은 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기야…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네만, 솔직히 말해서 의심은 아니지만 자네와 같은 해외 유학파들에 대해서 염려가 되는 바가 없지는 않다네! 그게 뭔고 하니, 신학문도 좋고 일본 유학도 다 좋은데, 해외 유학파들의 현실과 타합하는 듯한 그 우유부단한 온건주의는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니 하는 말일세!”
 “사람하고는 참…. 누가 승당 선생의 자손이 아니랄까봐서? 하지만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말게, 이 사람아! 우리 해외 유학파들 중에도 자네와 같은 강골은 많아! 그리고 날카로운 무쇠 창과 명검만이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부드러운 그물이나 통발로도 더 크고 많은 물고기들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좀 알아주시게나!”
 그들이 이렇게 현실 대응 방식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 새 국화원(菊花園) 마당까지 와 있었다. ‘국화원’이란, 영남루 앞의 드넓은 마당을 일컫는 말로서 천연의 황톳빛 사암(砂巖) 이 인공으로 깎은 듯이 반듯하게 깔려 있는 마당 바닥에 국화 모양의 아름다운 석화(石花) 문양이 은하수처럼 점점이 박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었다.
 누구나 국화원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선 그 눈부시게 아름답고 기이한 천연의 석화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지만, 중산과 운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누대 위의 연회장부터 먼저 올려다본다. 큼직한 화강암 초석들을 발판삼아 훤칠하게 높은 스무 개의 거창한 진사(辰砂) 빛깔의 두리기둥들이 늠름하게 떠받치고 있는 높다란 누대 위에서는 바야흐로 국책 관제연회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는지, 요란한 주악 소리와 함께 흥겨운 춤사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고을 안의 기생이란 기생들은 다 불러낸 것이리라. 화려하게 몸단장을 하고 군무를 추는 무희들의 수만도 기십 명은 족히 되어 보였고, 풍악을 울리는 남녀 악공들의 수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한일 합방이 된 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유림을 중심으로 하여 결집되고 있는 이 지역의 배타적인 민족정서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국책사업으로 베풀어지고 있는 행사인 만큼, 초청 인사의 수만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백 명이 훨씬 넘어 보였고, 상 차림새도 흥청망청 먹고 마실 만큼 아주 융숭해 보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원만한 식민지 통치의 활로를 모색해 온 일제가 자기들 나름대로 어떤 원칙을 세워 놓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러한 억지 잔치가 과연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인사들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마음을 열어 놓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 더러운 꼴을 안 보게 진작부터 동문 쪽의 고갯길로 내려갈 걸 그랬네 그려!”
 슬며시 걸음을 멈춘 운사는 중산을 돌아보며 소태 먹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중산은 안으로 타는 듯한 눈길로 여전히 누대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가 저 자리를 피해서 갈 이유가 무에 있는가? 오히려 피해야 할 쪽은 저쪽이 아닌가!”
 “그래도 억지 춘향이가 된 고을 어른들께서 좌불안석으로 겪고 계실 고초도 좀 생각해 드려야 하지 않겠나? 노구를 무릅쓰고 저 자리에 앉아서 겪고 계실 그분들의 육체적, 정신적인 고생인들 오죽하겠는가 말일세!”
 “그러고 보니 교동(校洞) 손씨(孫氏) 문중의 당주이신 자네 춘부장께서도 병을 핑계 삼아 끝까지 버티시다가 결국 총을 멘 왜놈 순사의 호위를 받으며 죄인처럼 저 더러운 연회에 끌려가서 일석을 차지하고 계실 터이니, 그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렷다?”
 모처럼 운사를 쳐다보는 중산의 얼굴에 한 줄기 웃음기가 번지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입가에 깊게 골이 패는 고뇌에 찬 웃음이었다. 고을 안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토반 문벌이라는 이유만으로 왜놈들의 집중적인 협박과 공갈에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하며 동족 간의 갈등에 이용되고, 동시에 친일 공작의 표적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명문 호족의 일원인 자기네도 똑같이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돈께서 남의 말을 하고 계시는구먼! 그렇게 말하는 동산리 여흥 민씨 문중에서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텐데 그래?”
중산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무심하기만 한 운사의 모습을 씁쓸하게 미소를 띤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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