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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한 바퀴

[2021-01-18 오전 10:57:52]
 
 
 

TV리모컨 쟁탈. 집집마다 흔히 있을 법한 다툼이다. TV는 하나뿐인데 보고 싶은 내용이 각각 다르니 당연히 생기는 일이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아내와 나는 가끔 이 일로 서로 양보하라고 우긴다. 아내는 교양/다큐’, 나는 시사/스포츠를 좋아한다. 보통은 내가 양보하고 아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함께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나도 교양/다큐를 자주 시청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집 탐구 프로정원이 있는 전원주택이나 소도시의 단독주택을 자세히 보여주고 설명을 곁들여주는 내용를 즐겨본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는지 요즘은 여러 방송사에서 다양한 내용을 색다르게 구성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배우 김영철의 여정을 통해 보여주는 도시기행 다큐멘터리 동네 한 바퀴를 보다가 아내가 제안을 했다. 우리도 그냥 무작정 걷지만 말고 동네 한 바퀴를 해보자고. 그래서 우리의 동네 한 바퀴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특별히 좋아하는 운동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냥 함께 걷는다. 시골에 살고 있으니 집만 나서면 어디서나 걸을 수 있는 여건이 된다. 바로 옆에 초등학교 운동장이 있고 사방에 들길이고 가까이에 낮은 산들도 있다. 특히 주변에 크고 작은 저수지가 여러 곳 있고 그 주변으로 아름다운 집들도 많이 있어 더 좋다. 그래서 이곳이 우리가 살아가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다.

처음엔 우리 동네서부터 시작해 이웃마을 그리고 점차 거리를 늘여갔다. 다른 일로 어딘가를 가도 꼭 그 주변의 동네를 구경하고 온다. 이제 우리 고장의 마을들은 거의 다 둘러 본 것 같다. 누군가 어느 마을에 좋은 집이 새로 지어졌더라고 해서 자세히 들어보면 대부분 가 본 집들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여러 집들을 보게 되는데 보통은 담 밖에서 들여다보게 되고 운 좋은 날은 한두 집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정원과 집을 자세히 둘러보게 된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어떤 날은 처음 방문한 사람을 집안의 거실까지 들어오게 해서 구경할 수 있게 배려해주는 마음이 넉넉한 주인을 만나기도 한다. 웅장하고 화려해 보이는 부잣집(?)들은 대부분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고 비교적 담이 높다. 그러니 발돋움을 해도 정원을 자세히 볼 수 없고 주인을 만날 수도 없었다. 나는 집을 구경하고 돌아오면 꼭 그날의 느낌을 몇 줄의 글로 남겨둔다. 그런데 글의 많은 부분을 건물이나 정원에 대한 것 보다는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나 따뜻이 사람을 맞이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내용이 차지하고 있다.

몇 년 쯤 많은 집들을 보고나니 내 나름대로 집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우선 건물이 웅장하고 정원이 넓다고 해서 아름답다거나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값비싼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거나 자로 잰 듯한 기하학적인 정원, 인위적으로 식물의 모양을 만든 정원은 그냥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넓지 않아도 자연스럽고 정겨움이 느껴져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고 싶은 정원도 자주 만났다. 보통 이러한 집들은 낮 동안에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주인을 만나지 못해도 정원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정원은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유도하는 것에 따라가는 것이란 말을 이제 조금 실감하게 된다.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던 어느 가을날. 이른 아침에 이웃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마을 구경을 마치고 와서 늦은 아침을 먹을 참이었다. 몇 번을 지나가면서도 집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는 느낌만 가졌을 뿐 그냥 지나쳤던 집이 있었는데 마침 그날도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날은 순간적으로 우리 오늘 저 집 구경해볼까?” 하면서 마주 쳐다보았다. 마침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집에 차가 주차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이 있는 것 같았다. 살며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을 불러볼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정원을 구경했다. 이른 아침이라 실례가 될까봐 부르지 못했다. 정원은 생각했던 것 보다 넓고 아름다웠다. 특히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들과 조금 경사진 마당이 좋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하얀 건물의 뒤를 받쳐 주는 뒷산의 소나무와 잡목 그리고 푸른 대나무 숲이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었다. 잠시 후 주인이 나왔다. 밝은 표정으로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면소재지 부근에 살고 있으며 아침 산책을 좀 멀리 나왔는데 지나가다가 집을 구경하고 싶어서 들어왔다고 말했다. 집 주인 내외분은 처음 방문한 낯선 사람을 따뜻이 맞아주었다. 잠시 후 집안에 커피를 준비 했으니 들어오라고 했다. 너무 감사했고 한편 미안했다. 아무래도 처음이고 이른 아침이라 집 안으로 들어가기가 미안해서 그냥 정원만 구경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모닝커피를 마셨다. 맛있는 빵과 과일과 두유도 곁들여. 자기들은 아침을 이렇게 간단히 먹는다며 괜찮으면 이걸로 아침을 대신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천천히 놀다 가시라고 했다. ‘동네 한 바퀴돌며 아름다운 집을 구경하면 이렇게 고운 심성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되는 행운도 따른다. 아름다운 집에서 사는 사람은 마음도 아름답다. 그날 만난 K선생 부부는 우리 보다 꼭 열 살 아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정겹게 지내고 있다. K는 나를 형님이라 부르고 그의 아내는 내 아내를 언니라고 부른다. 동생이 없는 나는 참 우연한 기회에 멋진 동생을 얻었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K는 시골생활을 하면서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글을 열심히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얼마 전 그 동생이 우리를 초대했다. 자기 집 황토방에서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했다. 돼지수육과 김장김치 그리고 생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겨울 해는 일찍 넘어가고 어둠이 내렸다. 따뜻한 황토방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다가 K가 방의 조명을 낮추었다. ! 그 순간 직사각형 프레임의 창으로 달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달은 멀리 들판 끝에 앉아 있는 서쪽 산 위에 걸려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정상진/전 밀양초등학교 교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정상진

 
 
 
말그미 교장선생님 내외분, 참 그 주인 내외분을 동생으로
잘 두셨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형님 내외분이나 아우님 내외분이나 다 썩 잘 어울리는
멋진분들같습니다.
저는 그 ''위양 새댁''의 블로그 이웃입니다.
그 전원엔 못 가봤지만 서울에선 두 번이나 만났고
블로그로는 매일 저녁 만나는 사이랍니다.
참 아름다운 수필을 한 편 읽었습니다.
2021-01-2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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