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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춤의 지혜

[2021-03-12 오전 10:58:50]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닫힌 창틈으로 비 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왔다. 아침에 비는 그치고 낮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멀리 산을 둘러보니 높은 산 정상 부근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있었다. 저 눈이 녹을 때까지는 꽃샘추위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래도 봄은 이미 가까이 왔고 머잖아 천지에 생기가 돌면서 조금씩 주변의 빈 공간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 채움의 주인공은 꽃과 잎을 비롯하여 파랗게 돋아나는 천지의 초록들일 것이다. 지난겨울에는 60년 만에 처음이라는 강추위가 있었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그런데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그 기억이 가마득하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수시로 변화하고 우리는 또 그것을 쉽게 잊는다. 그런데 좀처럼 바뀌지 않고 또 고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교만과 아집이다.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교만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만심일 뿐이며 실제로는 부풀어 오른 질병이다.” 철학자가 말한 이 교만이라는 질병은 아무도 고쳐줄 수 없고 다만 본인이 자각해서 스스로 고쳐야 하는 난치병이다. 그리고 이 질병은 보통 아집뻔뻔함이라는 합병증을 갖고 있다. 교만과 아집 그리고 뻔뻔함 이런 것들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난치병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모든 것은 수시로 변한다는 진리에 가까운 사실을 믿지 않고 지금 자신이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을 영원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자만과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소와 말이 홍수가 나서 강물에 빠지면 소는 살아서 나오지만 말은 익사한다. 말은 소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헤엄칠 수 있다. 말은 자신의 수영 실력이 언제 어디서나 통할 것이라는 자만심 때문에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다가 결국 힘이 빠져 죽게 된다. 그러나 소는 물살을 이기려고 하지 않고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면서 조금씩 밖으로 나와 결국은 강기슭에 닿게 된다.

한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어느 해 여름에 홍수가 났는데 나는 강물을 구경한다고 가까운 곳의 잠수교 부근으로 갔다. 지금은 주변에 높고 튼튼한 다리가 놓여졌다. 이미 강물이 잠수교를 살짝 넘어서 흐르고 있었고 빠른 속도로 수위가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승용차 한 대가 잠수교 위로 진입해서 지나가는데 우리는 모두 마음 졸이며 쳐다보았다. 강의 중간쯤에서 차는 옆으로 빙그르 돌면서 다리를 벗어나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성난 강물은 자동차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평상시의 강물은 여유 있고 평화롭게 보여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홍수가 나면 무서운 재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도 강물과 같다. 언제나 한결같지 않고 상황에 따라 급변하기 때문에 늘 겸손한 마음으로 삶을 마주해야 한다.

250년 이상을 거뜬히 견뎌온 어느 종가(宗家)의 종부(宗婦)는 말했다. 선대(先代)의 어른들이 모두 무사히 생을 마감할 수 있었고 현재의 종택(宗宅)이 온전히 보존 되어 온 그 비결에 대해서. 그것은 벼슬이나 권력의 힘도 아니었고 재력의 힘도 아니었으며 다만 겸손과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결과였다고.

민란이나 전쟁 등으로 나라의 치안이 극도로 불안할 때면 폭동이 일어나 하인이나 못가진 자가 상전과 가진 자의 재산을 약탈하고 생명을 해칠 때도 있었다. 그때도 이 종가의 사람은 해치지 않았고 재산도 함부로 약탈하지 않았으며 종택(宗宅)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난 민심도 이 종가의 선행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종가 사람들은 하인에게도 나이에 맞는 예우를 해주었다. 자녀들에게도 자신보다 나이 많은 하인들에게는 항상 존댓말을 쓰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이웃의 어려움을 내 일처럼 보살폈으며 심지어 흉년에는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못하게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양식이 없어 밥을 굶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라도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양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아래쪽에 구멍을 뚫어 놓은 큰 뒤주를 대문 밖 처마 밑에 항상 놓아두었다고 한다. 겸손과 배려의 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중국대륙의 통일이라는 큰 업적을 이루어 낸 진시황.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자기만 옳다고 여겨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잘못을 하고도 고칠 줄 몰랐으며 이 중에 포악무도하여 재앙이 가중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는데 집착했다. 그리고 죽은 후에도 자신을 지켜줄 군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경방어를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고, 자신이 묻힐 어마어마한 규모의 황릉과 사후에 자신을 지켜줄 병마용 갱 조성 등 과도한 토목공사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결코 그와 그의 나라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그는 50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그가 죽은 지 3년도 안 돼 그의 진나라도 멸망했다. 황제의 자리에서 만만 년 동안 강력한 권세를 누리고자 온갖 방법으로 철옹성을 쌓았지만 그가 생존하고 있는 시점에 벌써 그의 천하가 무너지고 있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교만과 아집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좀체 삶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게 맞는가 싶다가도 금방 또 의심이 나 쭈뼛대곤 한다. 좀 더 낫게 살아보겠다고 삐뚠 길을 기웃거리거나 머나먼 앞날까지의 안녕을 바라며 지나치리만큼 몸을 움츠릴 때는 서글퍼지기고 한다. 하루살이는 짧은 삶이 끝나가는 저물녘에 제 고운 의상을 뽐내며 논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그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함이 아니라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보석 같은 짧은 시간을 한껏 즐기고 있는 것이다.

소의 해가 시작된 지도 두 달 하고 반이 지났다. 너무 서두르거나 발버둥 치다 벌써 힘을 다 소진한 것은 아닌지 한 번 돌아보자. 자신의 지위나 힘만 믿고 거들먹거리지는 않는지도 생각해보자. 오래오래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권력도 재력도 아니며 다만 겸손과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일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겸손한 자세로 남의 말을 들으며 상대를 배려하는듯하지만 매순간 머릿속에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이는 사이비(似而非).

교만한 말은 죽고 겸손한 소는 산다’ - 우생마사(牛生馬死)의 교훈은 언제나 유효하다.

 

정상진/전 밀양초등학교 교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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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합니다.
겸손하게 살아야죠.
마음의 양식 감명입니다.
2021-03-20 14:17
박명숙 250년을 지켜온 종가집 이야기 와
'우생마사'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겸손하며 이웃들과 따뜻한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1-03-17 09:40
최다현 교만과 자만심은 부풀어 오른
질병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맘에 와닿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교만아닌듯 교만
스러운듯 발휘 하고 살때가
많죠 ~
겸손과 덕을 갖고 차츰 맘 비우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만
이역시 쉽지 않음을 압니다
노력하면서 살아야죠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봄 ~
두분이 늘건강하시고 복된삶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맘이 평온해지는 따뜻한글에
삶의 좋은 기운이 느껴 집니다
우생마사의 의미도 새기면서 ~
감사 합니다 ~
2021-03-16 17:00
김경희 간결하면서도 핵심이 선명한 '우생마사'를 읽으면서 교만과 겸손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따스한 봄날, 화사한 봄꽃처럼 온 맘이 사로잡혔네요 ㅎㅎ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2021-03-16 14:45
정복린 마음이 허전할 땐 가슴을 징 울리는 색소폰으로 위로를 주시더니 먼 앞날 걱정하는걸 어찌. 아셨는지 다시금 맑은 샘이 치솟게 합니다. 좋은 글로 마음다지게 해주셔서. 감사하구요 교만과. 아집을 깨닫고 내려놓는 삶으로 한발씩 디뎌보겠습니다. 2021-03-16 10:54
이현재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솟아나는 샘물처럼
스쳐가는 바람처럼
따사로운 햇살처럼
책갈피 속에 묵혀 두었던 옛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나는 듯
자그마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교장샘!
생된장에 풋고추 콕 찍어
탁배기 한잔 기울일
만남의 날 그려봅니다.
~거창에서 현재~



2021-03-16 09:57
사영미 마음의 양식이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21-03-16 09:31
이승호 '우생마사'
겸손하고 이웃과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따뜻하고 깊이 있는 글 늘 읽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습니다.
한번 찾아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으름이 부끄럽습니다.
2021-03-16 09:04
김정숙 내용이 가볍지도 않고 교훈적이면서도 설교적이라거나 지루한감이 없이 매끄럽고 적적한 예시들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특히말과소의 교훈과 한 종택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지극히 인간중심의 귀결이 인상깊었습니다ㆍ역시 주변에는 예로부터 반듯한 생각과 그것을 실천한 분들이 있었기에 힘든 시기, 시간들을 극복하고 삶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ㆍ잘읽었습니다 ㆍ감사합니다 2021-03-1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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