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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온 여승(女僧)-4

[2021-10-12 오후 3:42:59]
 
 
 

5장 운명의 그림자

 

석양에 온 여승(女僧)-4

 

그런데 그 언년이라는 하녀가 나한테 그렇게 문제시 되는 까닭이 대체 무엇이오?”

중산은 내심 자존심이 크게 상한 듯 쉽게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서방님,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제 얘기를 마저 들어 보십시오. 이번에 친정아버님의 얘기를 듣고 보니, 그 하녀는 당시 우리 여흥민씨 척족 정권의 실세 중의 한 분으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로 계셨던 승당 할아버님께서 조정으로부터 공훈으로 배정받은 두 노비 중의 하나로 소싯적부터 동문수학한 막역지기인 운곡 할아버님에 대한 각별한 우의의 징표로 우리 집에 내려 보내셨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씨가 무던히도 곱고 착했다는 그 하녀도 임오군란 때 반란을 일으킨 부하 군병들을 사전에 막지 못한 죄목으로 참수를 당한 무위영 소속의 구 훈련도감 군관의 딸로서 승당 할아버님 순절 후에 한양에 홀로 남은 청관 스님의 생모와는 친자매 사이로 바로 손아래 동생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런 말씀을 이번에야 듣고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고요!”

아니, 그렇다면 우리 친조부와 처조부님께서 임오군란 때 노비가 된 반란군 군관의 두 여식을 동시에 각각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하녀로 부리셨단 말씀이오?”

경악하는 중산의 두 눈이 의외로 담담하기만 한 박씨 부인의 얼굴을 집어삼킬 듯이 더듬는다. 그는 장인어른으로부터 임오군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편없는 급료미에 불만을 품고 선혜청(宣惠廳) 도봉소(都捧所)를 습격한 부하 군병들을 사전에 단속하지 못한 죄목으로 처형된 반란군 군관의 여식이 관노로 전락하여 척족 세력의 실세였던 승당 할아버지에게 전리품처럼 주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때 노비 신분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그 손아래의 친동생도 함께 승당 할아버지에게 전리품처럼 하사되었다가 해천껄의 처가에 우의의 징표로 내려 보내게 된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 서방님! 저 역시도 믿고 싶지도 않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적인 일로 뒤엉킨 두 집안 간의 얘기가 아닌, 슬픈 역사 속의 잔재이기에 우리 친정아버님께서도 남의 일처럼 넘겨 버릴 수가 없어서 혼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시다가 서방님이 떠나신 후에야 저에게만 따로 말씀을 하신 모양이고요. 그 자매 노비들을 하사 받아 부리셨던 윗분들 당대에는 몰라도 오늘에 이르러 청관 스님이라는 분이 승당 할아버님을 모시던 하녀가 낳은 서출로 확인된 이상 장차 가업을 계승할 우리 세대에서는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과제라 여기시고 저에게나마 그분의 이모가 되는 언년이의 얘기까지 함께 털어놓으신 것이 아닐는지요?”

아무리 슬픈 역사 속의 잔재라고 해도 그렇지, 세상에 어찌 그런 일 이!”

중산은 부인이 들려 준 말이 쉽게 믿기지 않는 듯, 망연자실한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문제점을 찾아냈는지 미간을 모으며 부인에게 다시 묻는다.

서울에 남아 있던 노비는 승당 할아버지의 핏줄을 낳았는데, 그렇다면 그때 처조부님께 내려 보냈다는 그 하녀는 그 후로 어찌 되었다는 말씀이오?”

사실은 두 자매의 처지가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친정아버님께서 서방님한테 직접 말씀하시기가 난감했던 게 아닐는지요?”

아니, 사정이 어떻게 달라졌기에 그러오?”

박씨 부인을 쳐다보는 중산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는 듯이 굳어진다.

언년이라는 그 하녀는 갑오년 노비 해방 때, 친정 할아버님께서 자유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잘 살라며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지참금까지 마련하여 방면해 주었으니까 그렇지요!”

아니, 뭐라고요?”

중산은 놀라다 못해 아연실색을 한다.

서방님, 제 얘기를 마저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노여워하실 일만은 결코 아니랍니다. 우리 친정 할아버님께서 그런 조처를 취하시게 된 것은 서울에 계시는 승당 할아버님께서 당신의 시녀 몸에서 태어난 서출 자식을 적자 못지않게 애지중지하신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들으시고 서 부득이 하게 그런 조처를 취하게 되셨나 봅니다. 왜냐하면,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당신께서도 절친이 취해야 할 도리로 그 서자의 이모가 되는 언년이 한테도 그에 상응하는 배려를 당연히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렇다면 장인어른께서 청관 스님을 낳은 손위 하녀의 얘기를 해 주시면서도 해천껄로 내려 보냈던 그 언년이라는 하녀에 관한 얘기는 왜 나한테는 감추고 당신한테만 하셨다는 말씀이오?”

중산은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결과적으로 그들 두 자매의 운명이 대조적으로 극명하게 엇갈렸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고 부담스러워지는 모양이었다.

서방님, 입장을 바꿔놓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친정아버님께서도 무릉 선생이라는 분으로부터 근자에 이르러 표충사 인근의 토굴 움막 은둔처에서 승당 할아버님이 의거 순절하실 때까지 침식을 같이 하며 시봉을 받들던 떠꺼머리총각이 사실은 하인이 아니라 당신의 하녀가 낳은 서출 자식이라고 귀띔해 주는 것을 듣고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사실 만으로도 당신께서 이미 느끼셨듯이 서방님께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고 짐작하셨을 터인데, 어찌 그보다 더 충격적일 수 있는 언년이의 얘기까지 한꺼번에 털어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차마 서방님께는 언급하실 수가 없어서 눌러 참으시고, 그 대신 저의 입을 통하여 시간을 두고 차차 아시게 하려고 그리하셨던 것이 아닐는지요?”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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