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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2019-03-12 오전 9:36:02]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눈 대신 비를 불러왔다. 천천히 비속을 달리는 차창에 실내의 온기가 서려 앞이 뿌옇게 흐려지곤 했다. 오디오를 작동시키고 손에 잡히는 CD 한 장을 밀어 넣었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왔다. 마치 처음 듣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가 뚝 떨어지듯 충격이 덮쳐왔다.
「점점 멀어져 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이별하면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이 있을까?

이별하는 것은 볼 수 있는데 이별 후의 만남은 왜 영원히 볼 수 없을까?

청춘과 이별하고, 가족을 떠나보내고 마침내는 자신의 몸마저도 떠나 보내야하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시간도 사람도 물건도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비가 내린 시간이 길었던지 앞산은 운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산이 마치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있는 듯하다. 마을 뒤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차츰 안개도 걷히고 햇살이 얼굴을 내밀면서 저 쯤 광제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척에 있지만 마음 뿐 자주 찾지 못했던, 내 성장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 이다. 섣달 그믐날이면 아버지를 따라와 이 암자의 작은 방에서 긴 밤을 보내고 새벽에 내려가기도 했고, 방학이면 한 달 동안 요사채에 머물면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형의 사십구일재(四十九日齋)를 올리기도 했던 곳이다. 겨울비가 내린 산사(山寺)의 마당에는 혼이 빨려들 만큼 적막함이 깔려있었다. 그 적막함 사이로 조용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홍매화를 발견하는 순간, 벌써 봄이 오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작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겨울 비속에 수줍은 듯 붉게 핀 홍매화를 가슴속에 담고 산길을 내려와 마을로 왔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우리 집을 기억으로 더듬어 보기 위해서다. 
 

고향이란, 더구나 고향집이란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공공의 개발 행위로 인해 고향이 제 모습을 잃기도 하고 더러는 여러 가지 형편에 따라 고향집을 지키지 못할 경우도 있다. 오늘 같은 날은 아직도 고향집을 잘 지키고 부모와 형제들이 고향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참으로 부럽다. 
 

고향집 토담 옆으로 흘러가던 도랑물은 시멘트로 덮여 주차장이 되었고 가을이면 볏단을 싣고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던 골목길도 제법 넓게 포장되었다. 내가 나서 자랐던 옛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 집터와 넓은 마당 그리고 남새밭에는 관공서가 지어졌고 식당들이 들어섰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저기쯤에는 방앗간이 있었고 여기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밥을 먹으며 가족이 함께 지내던 윗 채가 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외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들곤 하던 아래채가 있던 곳이었지. 그리고 신작로를 따라 길다랗게 정부 양곡과 비료를 보관하던 큰 창고가 있었지.’ 일요일이나 방학이면 자주 올라가서 하모니카를 불곤 하던 앞산 언덕과 당산나무가 그대로 있어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었다. 이제는 이미 한 집안의 어른이 되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이런 저런 얘기들도 나누어 보고 싶었지만 그냥 발길을 돌렸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지난날을 되새김 하면서 또 하루를 맞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가 없었더라면 오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지나간 것은 모두가 소중한 추억이다. 그리고 지난날은 그저 지나간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시켜 주기도 하고 삶이 지속되는 동안 따뜻한 가슴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랑과 희망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내 안에는 아직도 열다섯 살이 있고 서른 살도 있다. 그리고 성급하게도 칠순, 팔순의 노인도 어른거린다. 비록 작지만 욕망도 있고 반대로 체념도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켜켜이 쌓인 그리움도 숨 쉬고 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 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을 지나 긴 겨울을 보내면서 자주 불렀던 동요다. 그리고 2월에는 오세영의 시 ‘2월’ 「새 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일부)」을 낭송하며 우리 집 뜰의 매화를 눈여겨 살펴보았는데 2월이 다 지나도록 내 집 마당을 비추는 햇살은 매화의 개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움츠렸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음에도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것처럼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생각했다. ‘오늘을 붙잡아라’라는 말인데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어쩌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날마다 내 가슴의 창고에 한 가득 쌓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이제 앞만 보고 가서는 안 된다. 여유를 갖고 자주 되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내야 한다.

정상진/(前)밀양초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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