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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어보시게, 혼자서

[2020-08-11 오후 4:51:29]
 
 
 

-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대지를 달구고 있다. 이 무더위도 멀지 않아 떠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참고 이겨낼 수 있다. 무엇인가 바람직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노력 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자신감 같은 것이다. 풍요로운 가을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여름의 더위를 이겨 낸 결과 일 것이다. 한가롭고 여유롭게 흐르는 저 강물의 여유도 산골짜기 나무뿌리와 크고 작은 바위와 돌을 감돌며 험난한 계곡을 돌아 내려온 인내의 결과 인 것처럼. 그런데 우리는 가끔 시간과 노력이라는 투자 없이 행운을 기대하기도 한다. 지난 삶을 반추(反芻)해 보면 그런 행운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은 수시로 변하는 날씨와 같다.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더러는 뒤로 물러 설 때도 있다. 삶이 뒤로 후퇴할 때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화살도 시위를 뒤로 당겼다 놓아야 앞으로 날아가고 돌멩이도 팔을 뒤로 힘껏 젖혔다 던져야 멀리 날아가지 않던가. 한여름 장마철에는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찾아온다. 그러니 그 때는 날씨를 원망하기 보다는 우산을 항상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폭우와 폭염의 기세 앞에 무릎 꿇지 말고 힘차게 걸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인생의 여름이라는 한 시기에 주어지는 시련이며 여유와 안식의 열매를 맺기 위한 지혜의 축적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철지난 늦가을의 태풍은 어떨까? 속수무책이다. 아무런 대비 없이 태풍 앞에 서면 송두리째 삶의 기반이 허물어지고 만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다. 시기를 놓친 시련은 그냥 시련일 뿐이다. 극복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잘 익은 곡식과 과일들을 정성껏 보관하고 혹시나 찾아올지 모르는 때늦은 태풍에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겨울이 따뜻하고 여유롭다.

살다보면 변변찮은 일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평생 동안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고통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 사람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그 고통을 계속 붙잡고 놓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하고 정리가 안 될 때면 호수나 강을 찾아가 둑 위를 혼자 천천히 걸어보자. 물안개가 자욱이 낀 이른 아침이나 아직 어둠이 오지 않은 해질녘이 좋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좋고. 한참을 걷다 보면 마음이 정리 되고 뭉쳐 있던 마음속 응어리들이 녹아내린다. 거기엔 말없이 내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호수와 강물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 앞에 마음을 털어 놓아 위로의 말을 듣는 것 보다 낫다.

장마가 길게 이어지던 지난 달. 멀리서 한 친구가 왔다. 무척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은퇴한 후 작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퇴직하기 얼마 전에 아내가 지병으로 먼저 떠났다. 딸만 둘인데 혼자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어렵게 출가시켰다. 별다른 취미생활도 없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러지 말고 이제 자녀들도 다 결혼해서 떠났으니 좋은 사람 있으면 짝이라도 맺어 보라고 주변에서 권해 보았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그날따라 비가 오는데 옷차림도 표정도 초라하고 어두워 보였다. ‘마음이 힘들어 바람이나 쐬러 왔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워낙 말이 없는 친구라 물어도 대답을 잘 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는지라. 커피를 한 잔 씩 마시고 빗길에 운전을 하여 가까운 저수지를 찾아갔다. 한 시간 남짓 우리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고 비가 내리는 저수지를 바라보며 걷기만 했다. - 둑을 한참 걷다가 뒤로 돌아서서 아득히 멀어 보이는 걸어온 길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가 말했다.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녁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조금 들을 수 있었다. 술을 잘 못하는 친구인지라 반주로 마신 소주 한두 잔이 그의 말문을 틔웠다. 그의 이야기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아이들 결혼시키고 할 때 몇 년은 그냥 지내왔는데 모두 떠나고 난 후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외로웠다. 그런 중에 우연히 한 여자를 알게 되었고 자녀들 몰래 그냥 친구로 지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누는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지금은 동거를 요구 받고 있다. 자식들도 알게 되었다. 자식들은 아버지 알아서 하라고 하지만 엄마가 참 불쌍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외로움에는 관심이 적은 듯하다. 그리고 나 자신도 아내 생각에서 영원히 벗어나지는 못 할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이가 더 들어 건강에 자신감을 잃고 쓸쓸함을 이겨내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올지 스스로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백 살이 된 어머니라도 살아계시면 어리광이라도 부리며 매달리고 싶다고도 했다. 자신의 삶에 길을 안내 해 줄 피붙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는 것이다. 자식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그저 먼저 간 아내가 원망스러울 뿐이란다. 그의 머릿속에 더 복잡한 생각들이 있었겠지만 그쯤에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수지 둑 위를 걷다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에 뒤로 돌아서서 온 길을 바라보았을 때 마음에 결정을 내렸어. 걸어온 둑길은 아득히 멀었는데도 그 끝까지 어렴풋이나마 모두 보였는데 다시 돌아서서 앞을 보니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어. 검정 칠을 한 듯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내가 들어설 수 없잖아. 이제 돌아가면 그 여자에게 말 할 거야. 앞으로도 친구로만 만나자고.”

지난 시간은 되돌아보면 아무리 오래 전 일이라도 어렴풋이 생각이 나지만 앞날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으니 친구의 그 말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 천천히 걸어 보시게. 가끔은 뒤로 돌아서서 걸어 온 길을 보기도 하면서. 혼자서 말일세. 혹시 그 동네에 넓은 저수지나 버드나무 줄지어 서 있는 강둑이 있으면 나도 한 번 불러 주시게>

정상진/전밀양초등학교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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