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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지평선 1권(14)
제1장 산사를 다녀오던 날
[2019-04-22 오전 10:18:51]
 
 
 

천추에 새긴 文樣(5)

식민지 조선 약탈의 최우선 과제였던 <토지조사사업>은 1909년 6월에 <역둔토 실지 조사>와, 11월에 경기도 부천에서 시험적인 세부 측량을 함으로써 제1차 사업계획을 세우는 등, 제4차까지의 사업계획을 거쳐서 올 11월쯤에 토지조사 종료식을 갖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치밀하게 계획된 이와 같은 방대한 <토지조사사업>은 첫째, 자본주의적 토지 제도의 확립으로 식민 통치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정구역·도로·헌병 주재지 등을 설정하는데 이용하며, 둘째, 일본 이주민의 조선 정착에 필요한 토지 확보의 수단으로도 이용하고, 셋째, 무지주·무신고 토지의 국유화로 통치 기구의 재정을 굳건히 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실히 하며, 넷째, 전통적인 양반 계층의 지주권(地主權)을 일제 법상의 식민지적 지주계층으로 개편하여 식민사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이용하며, 다섯째, 조선인의 거주 실태와 동정을 토지와 결부시켜 살핌으로써 영구적인 식민통치의 기반을 구축하며, 여섯째, 모든 자원과 세금 파악을 확실히 하는 수탈 경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사업이 근 십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결과, 지금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 왔던 수백만의 조선 농민들은 졸지에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 소작인이나 화전민 또는 거리의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었으며, 그 반면에 <토지조사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왔던 조선 총독부는 벌써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토지 수탈에 혈안이 되었던 조선 총독부는 이들 토지를 지난 1908년에 국책회사로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후지흥업[不二興業]>·가타쿠라[片倉]>·히가시야마[東山]>·후지이[藤井]> 등의 일본 토지 회사와 일본 이주민들에게 무상, 또는 헐값으로 불하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전국 각 지역에서 속속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에 걸쳐 치밀하게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언필칭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의 확립’이라는, 저들이 내세운 그럴 듯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그 근본적인 목적이 자기네의 식민지 통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그 부작용은 이미 전국 방방곡곡에서 오뉴월 장마에 독버섯이 돋아나듯이 속속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토지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논과 밭, 대지 등, 이전부터 소유 개념이 명확했던 토지의 개인 소유권은 인정되었으나, 종래에 소유권이 설정되지 않은 채 잠재적 소유지로 남아 있었던 미개간지나 산림, 산야 등은 민유지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시켜 이미 그 소유권을 가차 없이 박탈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이 토지 조사는 과세대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신고를 하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는 소문까지 나도는 바람에 아예 신고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속출했고, 이미 경작하고 있는 땅을 제외한 황무지, 잡종지와 촌락 공동체의 전토(田土) 등에 대해서도 신고를 하지 않은 땅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 토지들은 모조리 국유지로 편입이 되어 가차 없이 조선 총독부로 넘어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 바람에 조상 대대로 금동역, 백족역, 마산역과 무량원, 마산원, 팔량적원, 이창원과 같은 역과 원의 둔토를 경작하던 상남면·하남면의 조선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전답을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거나 남의 집 하인으로 몸을 팔기도 하고,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일용 노동자로 거리에 나앉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유지들은 대부분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에게 염가로 불하해 주는 바람에 거의가 사유화가 되고 있었는데, 상남면 기산리의 대흥동 마을[일명 복강촌(福岡村)]이 바로 그런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왜인촌이었다.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불리게 된 것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한 조선 통감부 시절부터 일본 북구주 지역의 복강현(福岡懸)에 살던 부랑 하층민들을 자기들의 조선 식민지 경영정책에 따라 이곳에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마을을 이룬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리고 ‘짐일동’이란 이름도 따로 있었는데, 이것은 하루아침에 농토를 왜인들에게 빼앗긴 이곳 조선사람들이 호구지책으로 짐꾼 노릇을 하게 되면서 생겨난 이름이었다. 이곳 일대는 강폭이 넓은 응천강 하류를 따라 상남면의 예림리, 기산리, 평촌리가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서 수십 수백만 평이나 되는 기름진 땅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는 광활한 평야 지대였다.
 그런데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구한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기 직전인 광무 8년(서기1904년)에 일본인 토목 기술자인 송하(松下: 마쯔시다)라는 사람에 의하여 설계 시공된 송하보(松下洑)라는 관개 시설도 그와 같은 일본 이주민들을 위해 서둘러 건설한 토목 사업 중의 하나였다. 흔히들 ‘송합또랑’ 혹은 ‘송하보통’으로 불리는 이 송하보는 읍성 십 리 밖의 응천강 위로 경부선 철교가 가로 놓여 있는 가곡리의 용두목 절벽 밑에 굴을 뚫어 지상 구간의 수로에 연결한 다음, 그 수로를 다시 밀양역과 예림리 사이로 흐르는 응천강 강바닥의 지하 터널을 통하여 상남들 초입의 지상으로 연결한 거대한 수리 시설이었다.
 경술국치가 있었던 지난 1910년에 이 보(洑)의 공사가 완성된 후에는 복강촌이 있는 상남면 일대의 가뭄 피해가 많던 천수답은 물론, 왜인들에게 저가로 불하된 모래밭과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던 황무지가 전부 전국 제일의 옥답으로 바뀌었고, 그 바람에 관개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수리 안전답에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된 일본 이주민들은 시공자인 송하를 기념하기 위하여 커다란 동상까지 세워 놓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이주민들을 위하여 특수 토목 기술을 동원하여 송하보를 세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후속 조치로 수리조합이 설치 운영되고, 송화보에서 낙동강 본류와 만나는 응천강 하구에 이르는 수십 리나 되는 상남제(上南堤), 밀성제(密城堤) 등의 제방 축조 공사까지 후속으로 펼쳐지는 바람에 그 자금 조달을 위한 강요된 기부금 헌납과, 이용하지도 않는 수리 시설에 대한 거액의 수리 조합비까지 떠안게 되면서 이래저래 등골이 휠 정도로 큰 짐을 지게 된 것은 모두 중산네 집안을 비롯한 이 지역의 오랜 토반인 대지주들의 몫이었다.

岳山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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